퇴근 후 20분 잡일 박스를 만들어보니, 자잘한 일의 피로가 줄었다

퇴근 후 20분 잡일 박스를 만들어보니, 자잘한 일의 피로가 줄었던 경험을 공유합니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면 익숙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엔 고장 난 리모컨, 아직 붙이지 못한 수리 견적서, 교체해야 할 전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의 피로보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툭 던진 말이 있었다. 자잘한 일은 한곳에 모아두면 훨씬 덜 피곤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렇게 우리 집엔 작은 상자 하나가 생겼다.

작은 상자 하나로 시작된 실험

퇴근길 문구점에서 눈에 띄는 작은 플라스틱 박스를 샀다. 손바닥보다 약간 큰 크기, 별것 아닌 듯하지만 이상하게 뿌듯했다. 이름을 거창하게 붙이지도 않았다. 그냥 잡일 박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고무줄, 배터리, 볼펜심, 고쳐야 할 물건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마치 머릿속에 쌓였던 미뤄둔 일들을 눈앞에 꺼내놓는 기분이었다.

처음 며칠은 잘 되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고, 의자에 앉으면 그대로 눕고만 싶었다. 하지만 딱 20분만 하자고 마음을 정하니 이상하게 부담이 줄었다. 그 시간 동안은 TV도 휴대폰도 내려두고, 오직 박스 속 일들만 했다. 전구를 갈고, 서랍을 닦고, 리모컨을 새로 세팅했다. 단 20분을 보냈을 뿐인데, 남은 저녁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진 게 가장 컸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예전엔 하던 일을 자꾸 미루더니, 요즘은 먼저 움직인다며 놀려댔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큰딸은 색연필을 정리했고, 둘째는 책상 위 스티커를 모았다. 막내는 테이프를 꺼내 장난을 치며 내 옆에 앉았다. 어느새 우리 가족의 하루 끝 루틴이 되어 있었다. 고요하지만 묘하게 따뜻한 시간이었다.

미뤄둔 일을 모으니 생각이 가벼워졌다

잡일 박스를 꾸준히 쓰면서 느낀 건 단순했다. 공간보다 마음이 먼저 정리된다는 것.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만 담아두면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눈앞에 꺼내두면 오히려 편안했다. 일상 속 피로의 대부분은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 때문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잡동사니를 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마음속에 얽혀 있던 감정들도 조금씩 풀렸다.

서울대학교 심리학 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해야 할 일을 시각화하면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집중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머릿속에서만 떠돌던 해야 할 일들을 눈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부담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도 그런 변화를 느꼈다. 미뤄둔 일을 해결한 날은 유난히 기분이 가벼웠고, 밤에도 생각이 덜 복잡했다. 손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마음까지 닦아내는 느낌이었다.

인터넷에서는 퇴근 후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본다. 하지만 내 경우엔 정반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피로가 쌓였다. 몸은 쉬어도 마음은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20분의 정리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회복의 신호가 된 셈이었다. 그 작은 시간은 하루를 정돈하고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 만든 정리의 루틴

이제는 가족 모두가 각자의 잡일 박스를 가지고 있다. 큰딸은 학교 준비물과 다 쓴 노트를, 둘째는 장난감을, 아내는 영수증과 세탁소 표를, 나는 고장 난 공구와 못을 모은다. 주말 저녁이면 각자 박스를 꺼내 조용히 일한다. TV도 끄고, 음악도 끄고, 각자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집안은 고요하지만 묘하게 따뜻한 공기가 흐른다.

그 시간이 지나면 다음 주가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미뤄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크다. 전에는 주말마다 해야 할 일들이 쌓여 답답했는데, 이제는 주중에 조금씩 나누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아이들도 그 시간을 박스 타임이라 부르며 기다린다. 단순한 정리 시간을 넘어, 가족이 함께 호흡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하버드 의과대학의 연구에서도 일정한 루틴이 감정 안정과 자기 조절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일정한 시간에 반복되는 행동은 뇌에 예측 가능한 자극을 주어 불안을 낮추고 자신감을 키워준다고 한다. 잡일 박스가 우리 가족에게는 그런 루틴이었다. 그 시간은 단순히 물건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하루를 다시 다잡는 시간이었다. 눈앞의 질서가 마음의 균형으로 이어졌다.

결론

퇴근 후 20분 잡일 박스는 단순한 청소법이 아니었다. 일상의 혼란 속에서 나 자신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작은 상자 하나가 하루의 피로를 가볍게 하고, 마음의 여백을 만들어줬다. 미뤄둔 일들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느낀 건 단순한 성취감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이었다. 해야 한다는 부담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여유와 흐뭇함이 남았다.

하루의 끝에 단 20분만 내어도 삶이 달라진다. 눈앞의 상자를 비우는 일은 결국 내 마음을 비우는 일과 같았다. 잡일 박스 속엔 물건보다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피로, 미루던 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미안했던 마음까지.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떤가요? 혹시 머릿속에도 잡일 박스 하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 안에는 정리가 아닌, 당신의 여유가 담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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